저 말입니까?  

 


 


 

 

작성자 박 원호
작성일 2008-03-10 (월)
ㆍ조회: 2760   
20년을 기다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오래 전부터 꼭 보고 싶었던 연극, 그러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지난 주 우연히 부산일보의 문화면에서 상연 소식을 접했다. 일요일 날 오후 4시반 경 극장을 물어 전화를 걸었다. 그냥 오면 2만원/인(와~ 억쑤로 비싸네!), 예약하면 1만4천원(그래도 비싼 편!). 후다닥 택시를 타고 극장으로 갔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 나름으로 20년을 기다린 작품이다. 대학 시절 ‘지적 허영’으로 연극부에서 놀던 시절부터 관극을 고대했다. 이 작품은 샤무엘 베케트에게 노벨 문학상(1979)을 안겨주기도 하고,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부조리극하면 으레 감초처럼 등장하는 작품이 아니던가. 호기심으로 한때 ‘고도를 기다리며’ 극본을 구해 읽기를 시도했다. 첫장부터 너무 지루한 나머지 3분의 1도 안 읽어 내팽개쳤던 기억도 있다. 역시 ‘희곡은 연극으로 봐야 한다니까!’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고도(Godot)는 신이라는 둥, 고도는 허망한 우상의 상징이라는 둥, 워낙 주워들은 게 많은 터라 그것들만 짜깁기해도 훌륭한 평론 한편이 나오지 않을까........그런 바탕에서 극장을 찾았다. 극장 안에는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10 여 명 남짓했다.
노벨상을 받은 이 문제의 작품에 관객이 겨우 십여 명이라니! (이들 중 반 정도는 초대권으로 온 사람들이 아닐까...) 배우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했다.

극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제 1막의 줄거리는 다 헤진 양복 차림의 비렁뱅이 두 친구, 고고와 디디가 앙상한 나무 앞에서 지루함을 쫓아내기 위해 시시덕거린다. 그들이 늘 그 자리에서 맴도는 이유는 불시에 나타날 구원자, 고도 때문이다. 그러다가 가죽점퍼 차림의 포초라는 사나이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가 고도일 거라는 착각도 한다. 포초는 목에 개목걸이를 채운 몸종 같은 녀석을 끌고 나오는데, 시종일관 우격다짐으로 대한다. 마지막에 한 소녀가 등장하여 고도가 내일 여기로 올 거라는 전갈을 하고 사라진다.
제2막의 풍경과 줄거리도 1막과 비슷하다. 다만 앙상한 나뭇가지에 나뭇잎 한 잎이 달려 있는 게 다를 뿐. 고고와 디디가 지루함을 쫓기 위해 서로 욕지거리 경쟁을 한다. 그러던 중 또다시 포초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장님이 되어있다. 그들은 서로가 똑 같이 어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 먹고 있다. 극의 마지막에는 또다시 한 소녀가 등장하여 내일 고도가 여기에 올 거라고 하며 사라진다.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무슨 뜻을 전하고 싶었을까? 삶의 불가해성? 삶의 불예측성? 당시 베케트의 생활을 예상하건대, 작품 활동은 열심일지라도 속도 추종에는 한없이 느려 터졌던 작가에게 세상 변화가 그토록 해석하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노벨상을 받은 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새삼 생각해 본다. 아득한 신의 존재는 지금도 구원의 의미인가? 자유의지를 옥죄는 속박의 의미인가? 일설에 의하면, 유사 이래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신(종교)의 이름으로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한편, 30여 년 전에는 기다림이 미덕이었다. 소통을 위해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요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겠지만 예전에 비한다면 그 시간의 길이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짧아졌다. 문명의 이기, 휴대폰이 있기 때문이다. 왜 오지 않는지, 왜 늦는지, 왜 안 오는지가 금방 해소된다. 기다리지 않고 단박에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삶의 불가해성, 불예측성이 통신 기술에 의해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옛 노래가사가 생각난다.

‘기다리게 해놓고 오지 않는 그 사람아, 나는 기다림에 지쳐서 이제 그만 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