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말입니까?


 

 


 

 

작성자 박원호
작성일 2013-07-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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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프라>기우제(祈雨祭), 세종대왕의 고뇌를 엿보다
 
태종우(太宗雨)와 기우제
 태종은 임종을 앞두고서 동궁 세종을 불러 말했다. ‘나라에 가뭄이 너무 심한데, 내가 죽어 혼이 있다면 이날 비가 오게 하겠다.’고 했다. 과연 그 뒤 매년 음력 5월 10일에 비가 내려 이 비를 ‘태종우’라 했다(東國歲時記)
  또한 태종을 이은 세종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조실록 기사에 의하면, ‘무당과 중들을 불러 ‘도마뱀(蜥蜴) 기우제’를 행하고 범(虎)의 머리를 잘라 (용왕을 위해) 한강·박연(朴淵)·양진(楊津)에 넣다‘-세종26(1444)

  조선조만 해도 80% 이상의 농지들이 천수답(天水畓)이었기에 가뭄을 피해갈 수 없었고, 그때마다 기우제를 지냈는데, 고을마다 원님은 물론이고 국왕 또한 번번이 지냈다. 이번 호에는 기우제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자연관과 대처방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세종과 기우제(祈雨祭)
 
사직단(社稷壇)의 모습

 <조선왕조실록> 세종조 기사에서 ‘기우제(祈雨祭)’를 검색하면, 무려 199건의 기사가 나온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재위 32년 동안 어림잡아 매년 6번쯤 기우제를 국가적 대사로 치렀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종 31년에 등장하는 기우제 기사 한 건을 살펴보자.
 
 임금이 말하기를, “한재(旱災)가 몹시 심하니 기우(祈雨)를 늦출 수 없다. 이제 각처에서 기우(祈雨)를 일시에 함께 하고자 하는데, 사직(社稷)은 동궁(東宮)으로 하여금 친히 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번 7월 초6일에 북교(北郊)·사직(社稷)·종묘(宗廟)·우사(雩祀)·풍운뢰우(風雲雷雨)·삼각(三角)·목멱(木覓)·한강(漢江)에 모두 기우하여도 비가 오지 아니하면, 동궁이 사직제(社稷祭)를 친히 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1년(1449) 7월 3일

 이 기사에 의하면, 나라 주관 기우제에는 일정한 등급이 있었다. 먼저 기우제를 위해 왕이 친히 향과 축문을 전하되, 그 실행은 아랫것들(?)-소격서(昭格署) 주관-이 나서서 종묘·사직과 도성 주변의 명산들에서 지낸다. 그래도 하늘에서 신통한 응답이 없을 때는 다음 차례는 왕실의 2인자 동궁으로 하여금 기우제를 지내게 한다. 동궁이 친히 사직단에 나가서 비를 내려주십사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게 했다는 말이다. 만약 동궁이 나서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어땠을까? 최후의 카드로 임금이 나섰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에는 가뭄이든 장마든 홍수든 간에 자연재해는 모두 왕의 잘못으로 간주되었다. 정치를 잘못한 데 대한 하늘이라고. 이름 하여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다.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트리지 않는다(天網恢恢 疏而不失)’.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 대개 성인군자일수록 면피(免避)를 위해 그럴 듯하게 하늘을 팔리지 않던가.)
 하늘은 천지만물의 조물주로서 인간사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절대적인 인격체! 하늘과 인간은 인과율(因果律)로 맺어진 ‘천인감응(天人感應 또는 天人合一)’의 상하관계였던 것이다.
 천인감응설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로는 한대의 동중서(董仲舒 B.C. 176?~104)가 대표적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천자(天子)는 하늘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았기에 하늘의 뜻을 살펴 선정(善政)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하는 천하 만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 천자는 박애(博愛)·인정·관용 등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하늘이 경고로써 가뭄, 홍수, 지진, 일식, 월식 등 각종 재앙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주장은 시대마다 가끔씩 합리론자들에 의해 미신(迷信)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그 관성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왕조실록의 기록들
 ‘조선조의 왕들과 목민관들은 제사지내다 볼 장 다 봤다’는 말이 있다. <표 1>의 기우제 기록만 살펴봐도 능히 짐작이 간다. (자연재해 관련 제사는 장마가 심하면 기청제(祈晴祭), 겨울이 따뜻할 때는 기한제(祈寒祭), 눈이 적게 오면 기설제(祈雪祭) 등등.)

 
* 기우제가 총횟수가 20회 미만은 생략.
* 총수는 재위 동안 기우제를 지낸 전체 횟수
* 평균은 연중 기우제 횟수를 나타냄
           <조선왕조 기우제 자료>
 
<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추려낸 기우제 기록으로 다음 사항을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세종 때가 기우제 총 횟수와 연평균 횟수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물론 이 통계의 신뢰성에도 문제는 있다. 일례로 임진·정유재란이 있었던 선조 시대에는 난리 통에 기우제는 고사하고 농사도 제대로 못 지을 판이었으니까.........
 둘째, 고종 때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세종조에 측우기까지 만들어 전국적으로 강수량 통계를 내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하여 과학 영농을 했더라면 기우제 횟수라도 줄어야 할 텐데 오히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니 말이다. 
 셋째, 임진왜란(7년 전쟁) 때인 선조 때를 제외하면 연평균 3 차례 이상이다. 넷째,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린 영·정조 이후로도 기우제는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우제(舞雩祭), 기우제의 옛 이름
 
중국 곡부의 무우단

 조선조에는 기우제를 ‘무우제(舞雩祭)’라고 불렀다. ‘무우(舞雩)’의 유래는 고대중국의 기우제 제단의 이름으로, 지금도 노나라 곡부현의 동쪽에 그 실체가 전해지고 있다(그림 2 참조). 조선 역시 고대중국에서 예법과 제도를 수입하였던 터라 경향 각처에 ‘무우단(舞雩壇)’이라는 바위, 또는 ‘무우정(舞雩亭)’이라는 정자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또한 무우재는 이동주(1920~1979) 시인의 시(詩), ‘기우제’에도 등장한다. ‘비! 비! 비! 비! 비!/ 우러러 목이 쟁긴 소쩍새/돌아보아야/ 무잿불을 올릴 풀 한 포기 없고(하략).
이를 보면,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기우제를 ‘무우제’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기우제 절차와 기우제문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당시 가뭄 피해가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우제 절차와 제문(祭文)
  
상주의 무우정-본래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이다.

 기우제는 보통 12회에 걸쳐 행하였다. 장소로는 삼각산, 남산, 한강, 용산강, 저자도, 산천의 우사(雩祀), 사직과 북교(北郊), 종묘, 모화관의 연못, 경회루와 춘당대 등이고, 끝으로 5방의 토룡제(土龍祭)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기우제를 지낼 때는 죄수들을 석방하기도 하고, 전국에 금주령(禁酒令)을 내렸다고 한다.

 
기우제 올리는 모습

#1. 종묘 기우제문- “큰 열조는 인덕을 쌓았고, 기명(基命)이 깊고 정밀하여, 후인을 도우셨다. 내가 계승하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조심했으니, 근년 이래로 한재와 수재가 계속되어 벼가 여물지 않아서, 흉년이 거듭되어 호구(戶口)가 유이(流移)되고 도랑과 구렁에 시체가 메어졌습니다. (중략) 지금 7월 달에 벼이삭이 방금 피는데, 서늘한 바람이 그치지 않으니, 만물(萬物)이 시들어졌습니다. 더구나, 한재(旱災)로써 우리의 누른 곡식을 해쳤습니다. 다만 내가 덕이 없으므로 실로 죄와 허물이 있지마는, 이 백성은 무슨 까닭으로 이런 재앙을 만나리까. 내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이 어찌 그 다함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궁하면 반드시 부모를 부르므로, 감히 이같이 애원하오니, 원컨대, 상제의 궁궐 문을 열고 좌우에서 사정을 진술하여, 이 성물(成物)할 때에 미쳐서 저 우사(雨師)에게 명하여 비를 흡족하게 내려주신다면(하략)-세종5년(1423) 7월 13일 기사

 
  #2. 청주 상당산성 기우제문
-지금 백성들의 농사는 참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옛날에 자식을 도랑에 버린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생매장하는 자가 있으며, 옛날에 자식을 바꾸어 먹는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스스로 삶아 먹는 자가 있으니, 인류가 장차 살아남지 못하고 사람의 도리가 장차 다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도로에 굶어죽은 자와 시궁창에 버려져 있는 시신을 굳이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손가락을 꼽고 날짜를 계산하며 입을 벌리고 바라는 것은 오로지 보리가 익음에 있는데, 비가 제때에 오지 않고 뜨거운 햇볕이 극성을 부려서 가을에 심은 것은 패려다가 말라 죽었고, 봄에 파종한 것은 어린 싹이 타 들어갑니다. 온갖 곡식의 수확을 이미 바랄 수가 없으니, 오뉴월이 지난 뒤에는 장차 반드시 시체가 쌓여 들에 가득할 것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자는 이미 죽은 자와 다만 선후의 차이가 있을 뿐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는 비록 목민관(牧民官)이 백성을 잘못 다스려서 원망이 쌓여 재앙을 부른 소치이나 무거운 재앙을 저의 몸에 내리지 않고 심한 가뭄을 더하여 불쌍한 백성들로 하여금 다 죽어 남음이 없게 하시니, 이 어찌 그윽하게 보살펴 주는 신명(神明)이 차마 할 수 있는 짓이겠습니까. (중략)
이에 희생과 단술을 가지고 작은 정성을 아뢰오니, 우리 신명께서는 유연(油然)히 구름을 일으키고 패연(沛然)히 단비를 내려서 이미 끊어진 백성들의 목숨을 이어 주시고, 신(神)과 사람이 함께 누리는 복을 이루어 주신다면 군주의 명령을 받아 읍재가 된 자도 장차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이는 감히 신명이 저에게 보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요, 백성들의 고통을 감히 신명에게 하소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약천집(남구만 南九萬, 1629년 ~ 1711년)

 
 농사직설(農事直說)과 측우기
 
제천의 의림지(연합뉴스)

 <농사직설>은 1429년(세종 11)에 각도 관찰사들에게 경험이 많은 농부들로부터 농업 기술을 듣게 하고, 이를 모아서 간행한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벼의 파종법인 직파법(直播法)으로 논에 볍씨를 뿌려 그대로 키워 거두는 방식과 건답법(乾畓法)으로 밭벼식으로 키우는 방법 등이다. 가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농법으로 추정된다.
 한편, 세종은 세계 최초로 측우기(세종 23)를 발명하여 하늘의 심술(?)에 맞서 지역적· 계절별 강수량 통계를 내어 과학 영농의 기초를 닦았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표>에서 보듯, 이들로 인해 후대의 기우제를 줄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저수지(堤堰) 수축
 태종우의 일화를 남긴 태종도 숱한 수리(水利)사업을 펼쳤는데, 그 중에서도 고려 말 이래로 방치된 벽골제를 정비했고, 세종 역시 상왕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제언(堤堰)은 농사에 매우 유리(有利)합니다. 예전에 우희열(禹希烈)이 그 일을 전담(專擔)하였사온데, 그 중에 적당하지 못한 곳도 비록 있었으나, 농민이 제언으로 이(利)를 얻는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지금 만일에 제언의 설치를 다시 일으킨다면 한재(旱災)를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경상도에는 제언이 있는 곳이 많으므로, 토지의 비옥함이 다른 도보다 배나 더 하옵는데, 이는 그 명백한 효과이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략) -세종 26년(1444) 8월 12일 기사
 이 기사에 의하면, 세종 조에도 기우제에만 의지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록에 의하면 세종1년(1419년)부터 제언대장(堤堰臺帳)을 만들어 체계적인 관리와 함께 새로운 제언 개발에도 힘썼다. 어찌 보면, 기우제는 동요하는 민심을 위무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쇼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 ‘저수지 수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후속편에 다루기로 한다.)
 
  고종과 기우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종 조에도 숱한 기우제를 지내면서도 한편으론 과학적 영농에도 최선을 다했다. 이는 곧 백성들을 위로하는 한편, 다른 쪽으로는 무한 희망을 고취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종조의 그 과학기술이 일취월장하지 못하고, 조선 중기 이후 왜 쇠퇴의 길로 빠졌던 것일까? 그 방증으로 고종 대에 발간된 <기우제등록 祈雨祭謄錄>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인조 대부터 고종 대까지 253년간에 있었던 기우제의 기록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건수만 총 1,811건에 달한다. 종합백서로써는 가치가 있으나, 그 효용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의문이 많다. 시대착오적인 미신백서 같기 때문이다.

역사의 도정에는 숱한 기복이 있다. 유능한 지도자는 주마가편(走馬加鞭)을 하고, 무능한 지도자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세종대왕의 전방위 리더십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왕조실록
손종흠, 『한강에 배 띄워라, 굽이굽이 사연일세』, 인이레, 2011